韓国人のための三国史記?
「今回は三国史記についての資料よ」
三国史記 百済本紀 第3
「ハングル訳するさいに都合よく曲げられている可能性はないのか?」
「泣いて帰国を乞う、ってあるわね」
「この王子はのちに倭国から脱走しているのよ」
「曹操とか孔明が出てくるヤツだな」
「私知ってるー。諸葛亮曰く『他にすることはないのですか』とか、孔明『は、はわわ、ご主人様、敵が来ちゃいました!』ってやつだー」
「いや、それまちがいまくってる。支那の三国志じゃなくて朝鮮の三国時代のことを書いた史書でしょ」
「それ以前に、三国志の理解もさりげなくまちがっているわよ!前者の光栄『三國志』(初代)の軍師助言台詞はともかく、後者のはいったいなによ!」
「えーっ、知らないの?恋姫無双―ドキッ☆乙女だらけの三ご……」
「はい、ストップ!!ステキなボケをありがとう!リンクなんてはらないからね(怒)」
「ん?『恋姫無双』ってなんのことだ?教えてくれてもいいじゃないか」
「
だが断る!本題いくわよ!で、綿貫さんの言うとおり、三国史記は、高句麗・新羅・百済のことを書いた史書で、高麗の金富軾が書いたのよ」
「でもさ、これってかなり有名な本でしょ。わざわざここで取りあげる意味があるの?」
「だいたい、日本でも訳解つきで刊行されているだろ」
「ええ、ただ原文や読み下しをあげるだけならそれほど価値は無いわ」
「あー、何か企んでるんだ♪」
「そういうこと。作者がかつて韓国で購入した三国史記の百済・新羅と倭についての記述のハングル訳解部分を紹介するのよ」
「ハングル部分か。その考えは無かったなぁ」
「エンコリあたりで、原文の漢文どころか漢字の読めない韓国人に与えるにはいいかもね」
「……実は、エンコリの韓国人って、日本人の紹介・解釈した資料を、改竄したり切り取ったりして悪用することが多いのよ。ある論争の際、作者はここで扱った三国史記の原文をアップしたことがあるんだけど、日本人のベテランIDに『そのやり方はまずい』と忠告を受けたことがあったのよねぇ」
「そんなことがあったのか…」
「ええ。日本側に漢文などの資料解釈をねだった挙句、その結果を利用して自説の担保とする『情報乞食』ってやつなのよねぇ。作者も知識としては知っていたけど、迂闊だったわね」
「くれくれタコラ〜♪」
「おいおい。そういうネタは…」
「ま、それはそれとして、今回使用したテキストは、弘新文化社(홍신문화사)から刊行されている崔虎(최호)訳解(역해자)の三国史記ね。原文とハングル部分という順番であげていくわよ。メニューは以下のものを予定しているわ」
1.百済本紀 第3 阿莘 王
2.百済本紀 第3 腆支王
3.新羅本紀 第3 実聖尼師今
阿莘 王
阿莘 王(或云阿芳)枕流王之元子 初生於漢城別宮 神光炤 夜 及壮志気豪邁 好鷹馬 王薨時年少 故叔父辰斯継位 八年薨 即位
二年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拝真武為左将 委以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関弥城者我北鄙之襟要也 今為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 而雪恥也 遂謀将兵一万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意復石峴 等五城 先囲関弥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継 引而帰 三年春二月 立元子腆支為太子 大赦 拝庶弟洪為内臣佐平 秋七月 与高句麗戦於水谷城敗績 太白画見 四年春二月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将真武等伐高句麗 麗王談徳親帥兵七千陣於[シ貝]水之上拒戦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シ貝]水之役 親帥七千人過漢水 次於青木嶺下 会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労軍士
六年夏五月 王与倭国結好 以太子腆支為質 秋七月 大閲於漢水之南 七年春二月 以真武為兵官佐平 沙豆為左将 三月 築雙峴 城 秋八月 王将伐高句麗 出師至漢山北柵 其夜大星落営中有声 王深悪之 乃止 九月 集都人習射於西台 八年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徴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戸口衰減 九年春二月 星孛于奎婁 夏六月庚辰朔 日食有之 十一年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横岳 乃雨 五月 遣使倭国求大珠 十二年春二月 倭国使者至 王迎労之特厚 秋七月 遣兵侵新羅辺境 十四年春三月 白気自王宮西起 如匹練 秋九月 王薨
삼국사기 백제 본기 제3
아신왕
아신왕(阿莘 王)
아신왕〔아방(阿芳)이라고도 함〕은 침류왕의 원자이다. 처음에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날 때 신기한 광채가 밤에 비쳤다. 장성하자 지기가 호매(豪邁)하고 매나 말을 좋아하였다. 왕이 돌아갈때(태자가) 나이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가 왕위를 계승하여 8년 에 돌아가니 즉위한 것이다.
2년 봄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 남단에서 천지신명에 제사지냈다. 진무(真武)를 좌장(左将)으로 삼고 병마사를 위촉하였다.무(武)는 왕의 친 외숙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메큰 지략이 있으니 그때 사람들이 복종하였다.가을 8월에 왕이무에게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요지인데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통석(痛惜)하는 바요.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무끄러움을 씻어주오.” 하니, 드디어 장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변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는몸소 사졸들에 앞서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석현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이 성을 굳게 지키니 무는 군량의 길이 끊어졌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 봄 2월에 원자 전지(腆支)를 태자로 세우고 대사령을 내렸으며, 서제(庶弟)홍(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와 더불어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싸웠는데 패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년 봄 2월에 혜성이 서북방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에 왕은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고구려 왕 담덕이 친히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패수 위에서 막아 싸우니, 우리곤사가 대패하여 죽은 자가 8000명이었다.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에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지나 청목령 아래 머물렀는데, 큰 눈을 만나 사졸들이 얼어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회군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를 위로하였다.
6년 여름 5월에 왕은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잡혔다. 가을 7월에 한수의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7년 봄 2월에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沙豆)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에 쌍현성(雙峴 城)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장차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어 한산(漢山)의 북책(北柵)에 이르나, 그날 밤에 큰 별이 진영 안에 떨어져 조리가 나므로 왕은심히 나쁘제 여겨 이내 중지하였다. 9월에 도성 사람을 모아 서대(西台)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8년 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침범하려고 크게 병・마(兵馬)를 징발하니 백성이 전쟁에 괴로워 신라로 많이 달아났으므로 호구가 줄어들었다. 9년 봄 2월에 혜성이 규루성(奎婁星)에 나타났다. 여름 6월 경진일(庚辰日)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11년에 큰 가뭄이 들어 벼싹이 마르므로 왕이 친히 횡악(横岳)에 제사지냈더니 이내 비가왔다. 5월에 사진을 왜국에 보내어 큰 구슬을 구하였다. 12년 봄 2월에 왜국의 사자가 이르자 왕이 맞이하여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14년 봄 3월에 백기(白気)가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마치 필련(匹練)과 같았다.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갔다.
「文中の赤太字がよく引用されるところよ。そして画像はこれね」
「確認した結果、赤太字部分については歪曲は無かったわ」
「倭国に使者を出して『大珠』を求めたってあるわね」
「ここで重要なのは『倭国使者至 王迎労之特厚』ってところよ。ふつう外国の使者が来ても、わざわざそれを迎えたなんて書かないわ。使者を儀礼的に迎えるのはあたりまえだからね」
「わざわざ迎えたって書いているには理由があるんだな」
「そういうこと。つまり通常儀礼に則って迎えたのではなく、わざわざ王みずからが特別な儀礼を用いてうやうやしく迎えた、と理解できるわ」
「それって、小国が大国に応対する儀礼よね。単に、欲しがっていた珍しい物産を持ってきたからという理由で特別な儀礼は用いないし」
「ええ。倭国の珍奇な物産については、『隋書』巻八十一 東夷伝 倭国の条に、『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というのと対応するわね」
「ねえねえ、こんなサイト見つけたよ!」
삼국사기 안내와 검색(三国史記 案内 検索)
「おおっ!すげー!」
「ちゃんと原文もあるじゃない」
「一生懸命ハングルをキーボード入力していた作者の苦労はいったい……ORZ」
「でもさ、全文掲載というわけじゃないみたいだよ」
「よ、よし、このシリーズは続行ね!次は百済本紀の腆支王の条よ」
「阿莘 王の息子だな」
「たしか、倭国に人質として出されたとか書いてあったわね」
「おー、倭国は誘拐犯なんだね。子どもの命が惜しければ身代金を出せーってやつだ。悪い犯人にはお仕置きチョーップ!!」
「あがっ!!なぜに私が?!」
「この場合の人質は、同盟あるいは従属関係にある外国に出すものと解釈されるわ。まちがっても文化使節や政治指導のために派遣しているんじゃないからね」
「半月城!羊月城!」
「さ、例によって、弘新文化社(홍신문화사)刊行の崔虎(최호)訳解(역해자)の三国史記から、原文とハングル部分という順番であげていくわよ」
三国史記 百済本紀 第3
腆支王
梁書名映 阿莘 之元子 阿莘 在位第三年立為太子 六年出質於倭国 十四年王薨 王仲弟訓解摂政 以待太子還国季弟[石枼 ]礼殺訓解 自立為王 腆支在倭聞訃 哭泣請帰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既至国界 漢城人解忠来告曰 大王棄世 王弟[石枼 ]礼殺兄自立願太子無軽入 腆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国人殺[石枼 ]礼 迎腆支即位 妃八須夫人 生子久[人のしたに小]辛
二年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二月 遣使入晋朝貢 秋九月 以解忠為達率 賜漢城租一千石 三年春二月 拝庶弟余信為内臣佐平 解須為内法佐平 解兵為兵官佐平 皆王戚也 四年春正月 拝余信為上佐平 委以軍国政事 上佐平之職始於此 若今之家宰 五年 倭国遣使送夜明珠 王優礼待之
十一年夏五月甲申 彗星見 十二年 東晋安帝遣使册命王為使持節都督百済諸軍事鎮東将軍百済王 十三年春正月甲戌朔 日有食之 夏四月 旱 民饑 秋七月 徴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十四年夏 遣使倭国 送白綿十匹 十五年春正月戊戌 星孛于大微 冬十一月丁亥朔 日有食之 十六年春三月 王薨
삼국사기 백제 본기 제3
전지왕
전지왕(직지라고도 함)은 양저에 이름을 영 이라고 하였다. 아진왕의 원자로저 아진왕 재위 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나갔다. 14년에 왕이 돌아가자 왕의 둘째 아우 훈해(訓解)가 섭정하며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아우 혈례([石枼]礼)가 훈해를 죽이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곡읍하며 돌아가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송케 하였다. 국경에 이르사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알리기를, “대왕이 세상을 버리자 왕이 아우 형을 죽이고 자림하였으니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 하였다. 전지는 왜인을 머무르게 하여 자신을 호위토록 하고 섬에 의지하고 기다렸는데, 나라 사람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즉위한 것이다. 비는팔수(八須)부인으로 아들 구이신(久[人のしたに氺 ]辛)을 낳았다.
2년 봄 정월에 왕은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 신명에 제사지냈으며 대사령을 내렸다. 2월에 사신을 진에보내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해충(解忠)을 달솔로 삼고 한성의 벼 1000석을 주었다. 3년 봄 2월에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으로,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는대데 모두 왕의 친척이었다. 4년 붐 정월에 여신을 승진시켜 상좌평(上佐平)으로 삼고 군국정사를 위촉하였다. 상좌평의 관직이 이로써 시작되었는데 지금의 총재와 같다. 5년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야명주(夜明珠)를 보내니 왕은 두터운 여로써 대점하였다.
11년 여름 5월 갑신얄(甲申日)에 혜성이 나타났다. 12년에 동진(東晋)의 안제(安帝)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명하여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 왕이라 하였다. 13년 붐 정월 갑술일(甲戌日)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에 가뭄으로 백정이 긂주렸다. 가을 7월에 동・ 북 2부(部)의 사람으로서 나이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고 병관좌평 해구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14년 여름에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흰 무명 10필을 선사하였다. 15년 봄 정월 무술일(戊戌日)에 혜성이 태미성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정해얄(丁亥日)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16년 봄 3월에 왕이 돌아갔다.
「文中の赤太字がよく引用されるところよ。そして画像はこれね」
「朝鮮半島お得意の泣き男なのかな?」
「半島のバカ学者たちが言うように、百済が倭国より上で、この太子も人質でないのなら、悲しみと孝心のあまり泣くのはともかく『倭王に命じて兵百人を出さしむ』くらいの表現でないとおかしいわね」
「阿莘 王のときと同じで、ここでも倭国から『夜明珠』が贈られているぜ」
「ええ。しかもここでも王は『優礼待之』、つまりあつく遇したとあるわね。これだけを見ても倭国のほうが立場は上と言えるわ。
次は新羅本紀ね。こっちも倭国に人質を出しているわ」
「へー、倭国ってえらく強いのね」
「え?歴史の授業じゃそんなこと習わなかったぜ。朝鮮半島から先進文化が伝えられたり、それを持った人がやってきたってくらいしか知らねーけど」
「まぁ、特に戦後の歴史学は、戦前の反動もあってか、朝鮮半島の役目を過大評価しすぎるところがあるわね。支那大陸から海上の道を伝って人や文化がやってきたことに対してはけっこう低く見積もってるし」
三国史記 新羅本紀 第3
実聖尼師今
実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飡之子 母伊利夫人(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味鄒王女也 実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国人立実聖継位
元年三月 与倭国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為質 二年春正月 以未斯品為舒弗邯 委以軍国之事 秋七月 百済侵辺 三年春二月 親謁始祖廟 四年夏四月 倭兵来攻明活城 不克而帰 王率騎兵 要之独山之南 再戦破之 殺獲三百余級 五年秋七月 国西蝗害穀 冬十月 京都地震 十一月 無氷 六年春三月 倭人侵東辺 夏六月 又侵南辺 奪掠一百人
七年春二月 王聞 倭人於対馬島置営 貯以兵革資粮 以謀襲我 我欲先其未発 揀精兵撃破兵儲 舒弗邯未斯品曰 臣聞兵凶器 戦危事況渉巨浸以伐人 万一失利 則悔不可追 不若依険設関 来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 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策之上也 王従之
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 質於高句麗 十二年秋八月 雲起狼山 望之如楼閣 香気郁然 久而不歇 王謂是必仙霊降遊 応是福也 従此後禁人伐樹木 新成平壌州大橋 十四年秋七月 大閲於穴城原 又御金城南門観射 八月 与倭人戦於風島克之 十五年春三月 東海辺獲大魚 有角其大盈車 夏五月 吐含山崩 泉水湧 高三丈 十六年夏五月 王薨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3
실성이사금이
실성이사금이 즉위하니, 알지의 후손이고 이찬 대서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伊利)부인[이(伊)는 기(企)로도 씀]이니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요, 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신장이 7척 5촉이요, 명달하고 원대한 지식이 있었다. 내물왕이 돌아가고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이 실성을 세워위를 계승하였다.
윈년 3월에 왜극과 우호를 통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블모로 잡혔다. 2년 봄 정월에 미사품(未斯品)을 서불한으로 삼고 군국(軍国)의 일을 위촉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변방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월에 친히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4년 여름 4월에 왜병이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왕은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의 남쪽에서요격하여 다시 싸워서 무너뜨리고 300여 명을 살획하였다. 5년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에 누리가 곡몰을 해쳤고, 겨울 10월에는 서울에 지진이 있었으며,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6년 붐 3월에 왜인이 동변을 침범하였으며, 여름 6월에 또 남변을 침범하여 100명을 약탈하였다.
7년 봄 2월에 왕이 든으니, 왜인이 대마도(対馬道)에 진영을 설치히고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여 우리를 습격할 모의를 한다하였다. 그들이 발동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병을 뽑아
그 무기고를 쳐부수려고 하니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병사는 흉기요, 전쟁은 위태한 일이라 합니다. 하물며 대해를 건너서 남을 치다사 만일 잘못되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험한 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그들이 들어오면 방어하여 침략을 할수 없도록 하고 나아가 사로잡으면 이는 이른바 남을 오게 하면서 남에게 끌리지 않는 것이니 꾀의 상책입니다.” 하므로, 왕은 응종하였다.
11년 내문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불모로 잠혔다. 12년 가을 8월에 구름이 낭산(狼山)에 일어서 누각(楼閣)갈이보였으며 향기가 풍겨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왕은 말하기를, “여기는 반드시 선령이 내래와 노는 곳이니, 응당 복지(福地)일 것이다. 이 후부터는 수목을 배지 못하도록 하샤오.” 하였다. 평양주(平壌州)에 대교(大橋)를 신성(新成)하였다. 14년 가을 7월에 혈성원(穴城原)에서 크게 열병하고, 또 금성의 남문에 거둥하여 활쏘는 것을 보았다. 8월에 왜인과 더불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15년 봄 3월에 동쪽 해변에서 큰 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었고 그 크기가 수레에 팍 찼다. 여름 5월에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솟았는데 높이가 세 길이었다. 16년 여름 5월에 왕이 돌아갔다.
「文中の赤太字がよく引用されるところよ。そして画像はこれね」
「すごーい!栄光への脱出なのかな?」
「捕虜の脱出ってのはロマンだよな!」
「……でもね、ただで逃げ出せたというわけじゃないの。新羅から派遣された朴堤上(『三国遺事』では金堤上)が、倭を欺きわが身を犠牲にして逃がしたのよ」
「まさに忠臣ってやつね」
「気が向いたら、その話も『三国史記』『三国遺事』の原文・ハングル訳を載せるかもしれないわ。とりあえずはここで終了ね」